Monday, January 3, 2011

[최보식이 만난 사람] 캄보디아서 시집와 '경찰관' 된 라포마라씨최보식 선임기자



"아이가 차별받을까 봐 경찰에 지원… 이젠 가문의 영광"'가난한 나라에서 돈 때문에 왔다' 수군 상처받고 속도 많이 상해하루 10시간씩 한국어공부 낮잠 버릇 없애느라 고생내가 열번 웃으며 인사하면 한번은 돌아온다고 생각"사람은 자기가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아이가 따돌림받지 않을까 가장 걱정이 됩니다. 제가 경찰이 되려 한 것도 아이 때문에, 어떻게 말해야 될까, 아이가 혼혈이고 엄마가 이주여성이라 무시 안 당하려면 제가 열심히 노력해 무엇을 해야겠다고 항상 생각했습니다."충주에 있는 중앙경찰학교의 창밖으로 수북이 쌓인 하얀 눈이 보였다. 까무잡잡한 여성의 경찰 제복에는 '264기 라포마라' 명찰이 달려 있었다.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라포마라(29)씨는 작년 말 경찰 외사요원 특별채용시험에 합격했다. 여섯달간 합숙교육을 받고 있는 중이다. 그녀는 솔직하고 쾌활했다. 한국어 대화는 거의 막히지 않았다."올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다른 아이들이 '네 엄마 외국인이네' 하겠지요. 제 이름에서도 당장 드러나죠. 당초 귀화할 때 개명(改名)까지 고민했어요. 라포마라에서 한 자를 빼고 '라마라'로 할까. 하지만 이는 현실이고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대신 제가 인정받게 되면 아이도 자신있게 자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그녀는 이번 시험에서 캄보디아어(語)를 전공한 한국인 응시자들과 경쟁했다. 번역, 회화, 구두면접, 서류심사, 체력심사 등을 거쳤다. 7대1의 경쟁률이었다."시댁에서는 '가문의 영광'이라고 했어요. 여기서는 6시에 기상해 운동장 세 바퀴를 달리고 오후 다섯시까지 교육이 있습니다. 경례하는 법과 '차렷, 열중쉬어'도 배웠어요. 좀 힘들지만 너무나 재미있어요. 방과 후에 저는 따로 한국어 공부를 합니다. 가족과는 떨어져 지냅니다. 아이가 보고 싶죠. 주말에 집에 가면 남편이 '똑똑한 여자와 살면 남자가 힘들다'고 농담합니다."그녀는 2003년 한국으로 시집왔다. 그전까지 수도 프놈펜에서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인 사업가들에게 월 50달러를 받으며 캄보디아어를 가르쳤다. 그녀가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전을 겪었던 나라에서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공무원인 그녀 아버지의 학구열 때문이었다. 당시 지금의 시아주버니가 캄보디아에 놀러 왔고, 그녀를 보고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남이 있는데" 하며 의사를 물어왔다고 한다. 아직 국제결혼정보업체를 통해 '캄보디아 신부'가 들어오지 않을 때였다."그전에는 한국이 북한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은 우리에게 인기 최고였어요. 그때부터 꼭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때마침 그런 제안이 왔습니다. 이건 기회다, 많은 걸 배울 수 있고 제 꿈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어떤 꿈을요?"한국에 가면 미국처럼 월급이 많고, 쉽게 말하면 고생이 끝난다는 것이죠. 누구나 욕심이 있죠, 없다면 거짓말이죠. 가서 돈 좀 많이 벌어서 가족들에게 도움을 줘야겠다. 한국에서는 아들이 가족을 책임지잖아요. 캄보디아에서는 딸이 책임져요. 저는 3남3녀 중 맏딸이어서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요. 물론 우선은 한국에 와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었죠."―전혀 본 적 없는 낯선 한국 사람과 결혼할 의향을 묻는데, 순순히 '좋아요' 답했다는 말인가요?"캄보디아 남자들은 돈이 있는 여성과 결혼을 원해요. 우리 집안은 먹고살기 힘든데, 누가 나랑 결혼하겠어요. 똑똑해도 소용없어요. 캄보디아에서는 직장을 얻기도 돈을 벌기도 어려워요. 한국에선 고작 1달러가 중요하지 않잖아요. 우리는 중요했어요. 비록 본 적이 없지만, 운이 좋으면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사전 정보도 없이 말입니까?"남편은 이메일을 통해 연락하고, 자주 선물을 보내왔어요. 6개월간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남편이 어디서 사는지, 가족이 몇인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확인했어요. 남편은 당시 신발가게를 했고, 지금은 시아주버니와 함께 도자기 재료를 만드는 사업을 하고 있어요. 결혼하기 전 남편이 캄보디아에 한번 들렀어요."남편은 열다섯살이 많았다. 막상 만나보니 어떠했느냐고 묻자, 그녀는 웃음을 머금고 소리쳤다."그런데 동안(童顔)! 동안이라서 너무 마음에 들었어요. 피부도 하얗고 좋았어요. 착하게 보였고 인사를 굉장히 잘해요. 서로 부족한 부분은 맞춰 살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부모님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마음에 들어 했어요."―가족과 떨어져 낯선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심정이 어떠했나요?"캄보디아에서 전통혼례를 치르고 사흘 뒤 입국했어요. 공항에서부터 너무 기뻤어요. 보이는 것마다 '역시 부자 나라는 다르다'고 감탄했어요. 하지만 이건 잠시였어요. 광주에서 시댁 가족과 만나니 의사소통이 안 됐어요. 뭘 말하고 싶은데 못해요. 그때는 제가 혼자라는 걸 실감했어요. 저는 영어를 좀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영어가 그렇잖아요.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제게 벌어질지 너무 걱정스러웠어요."―처음에는 말이 안 통해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서웠겠군요."정말 시댁 식구들의 도움이 컸어요. 저를 동사무소, 구청, 법원, 병원, 경찰서로 데려다니며 일일이 가르쳐줬어요. 직접 서류를 떼거나 용무를 보도록 시켰어요. 한국에서 하루 이틀 사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살아야 하기 때문에 한국어를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하루 열 시간 이상 공부했어요. 한국어 교재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공부를 했어요. 말도 그렇지만 문화 차이도 힘들게 했어요."

▲ 봄이면 일선에서 근무하게 될 라포마라씨는“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따뜻하고 친절한 경찰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신현종기자 shin69@chosun.com ―어떤 경우를 겪었습니까?"형님 부부와 같이 살았거든요. 아침이면 일어나서 밥해야 하고 함께 식사해야 해요. 그런 게 너무 힘들었어요. 캄보디아에선 아침에 일어나 라면 죽 같은 걸 사 먹었어요. 배고프면 혼자 알아서 먹습니다. 여기에 와서도 저는 아침에 혼자서 라면만 먹었어요. 그렇게 먹다가 눈치를 받았어요. 또 저는 점심을 먹고 나면 무조건 자요. 캄보디아에선 덥기 때문에 두세 시간씩 자야 해요. 건강해야 병원 갈 일이 없잖아요. 한국에서는 이건 이해가 안 되잖아요."―막 결혼한 신부가 시댁에 살면서 낮잠을 잤다는 말이지요?"거의 한 달간 그렇게 했어요. 남편은 가게에 나가니까 모르는데 같이 지내는 형님은 보잖아요. 사실 형님이 힘들었을 거예요. 그러다가 낮잠 자는 시간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 끊었어요. 처음에는 낮잠을 안 자니까 머리가 아팠어요. 한국 생활 법에 따라야죠. 나중에 제가 통역 자원 봉사를 할 때였습니다. 캄보디아 여성과 결혼한 분이 부부싸움을 벌이고 이혼하겠다며 찾아왔어요. 부인이 잠옷 차림으로 외출한다는 거예요. 캄보디아에선 그럽니다. 이런 문화 차이에다 말이 안 통하니 답답하죠."―그러니 두고온 친정 식구, 특히 엄마 생각이 나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던가요?"처음 1년간 힘들었어요. 마음속으로 '이건 아닌데, 잘못 선택했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고향 집이 계속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혼이 장난이 아니잖아요. 잘 살아야죠. 그러려면 견디고 참아야 해요. 저는 결혼은 꼭 한 번만 하고 싶어요."―그런 갈증을 어떻게 풀었나요?"남편 앞에서 '가족이 보고 싶다'고 두 번쯤 울었어요. 아기를 낳고 캄보디아에 갔어요. 한 번 다녀오니 그 뒤로는 많이 안 보고 싶었어요. 지금껏 세 번 다녀왔습니다. 이제는 여기가 편하고 캄보디아가 불편해요. 한국에서 사는 것이 더 익숙해진 거죠."―그럼에도 여전히 한국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어떤 것입니까?"그것은 바로 인종 차별이에요. 좀 그런 게 있습니다. 캄보디아에선 외국인을 보면 너무 반갑다며 아주 좋아해요. 한국 사람은 안 그래요. 특히 동남아 사람들을 보면 '가난한 나라에서 돈 때문에 왔다'는 말을 해요. 저도 많이 들었어요. 캄보디아 사람이 한국으로 시집온 것은 제가 두 번째라고 했어요. 우리 동네에서는 다 한국 사람인데 저 혼자만 외국인이었어요. '너는 피부색이 왜 까맣냐, 왜 눈이 크냐'고 해요. 사람이란 누구나 차이점이 있죠. 그런 걸 인정하지 않는 건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면전에서 그런 차별적인 말을 들었을 때 직접 대응한 적은 없습니까?"미용실에 갔을 때였어요. 저도 파마를 하고 싶고 이쁘게 하고 싶잖아요. 어느 아줌마가 저를 보고 '외국인이잖아'하고 크게 소리쳐요. 제가 어디 외계인이나 귀신이나 되나요. '아니 왜 놀라세요? 똑같은 사람인데' 했어요. 제 뒤에서 '저런 여자들이 한국에 돈 때문에 와서는 도망간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처음에는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속도 상하고. 같은 인간인데…. 한번은 너무 힘들어 남편에게 '우리 돈 좀 벌고서는 캄보디아에 가서 살자, 거기서 우리 식구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도 했어요."―한국서 7년 넘게 살았는데 지금도 인종 차별을 느끼고 있습니까?"솔직히 그런 사람이 못됐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한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기 때문에 바꿀 수는 없어요. 또 한국인은 한국인들끼리 살아왔는데 갑자기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다문화 사회가 되니 그럴 수 있겠다고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제 그 사람들이 나를 좋게 생각하든 말든, 우선 제가 잘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열 번 인사하면 한 번은 돌아오지 않나, 그렇게 마음먹으면 편하잖아요. 우선은 내 마음을 바꿔야 해요."―이주여성들끼리 만나면 한국인이나 남편 욕을 많이 하겠군요."한국 사람에 대해 욕하기보다는 고향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합니다. '너네 남편 잘 해줘?' 물어도 남편 나쁘다는 말은 안 합니다. 경쟁심 때문에 '나도 잘 산다'고 맞장구치면서 남편 칭찬을 많이 해요. 자신이 다른 친구들보다 못 산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은 게 있거든요."―지금까지 아이를 기를 때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습니까?"동화책을 읽어주고 숙제를 도와주는 것은 됩니다. 하지만 깊은 얘기는 잘 안 돼요. '너는 어떻게 하니, 엄마가 한국인이 아니고 이주여성이라 이런 걸 잘 못 하니 너무 미안하다'고 말한 적도 있어요. 아이가 아직 어리니까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아이 친구들은 제가 캄보디아인이라는 걸 다 알아요. 아직은 잘 지내는 것 같아요. 걱정은 많습니다. 다문화 사회가 될수록 점점 좋아지겠죠. 제가 경찰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 아닐까요."그녀는 이주여성 중 열한번째로 경찰관이 됐다. 현재 국내 외국인 체류자는 100만명을 넘었고, 이 중 이주여성은 15만명이다.

1 comment:

Anonymous said...

thanks for sharing.